남⁠과 비⁠교⁠하⁠며 사⁠는 이⁠유: 열⁠등⁠감⁠과 비⁠교⁠중⁠독⁠에⁠서 벗⁠어⁠나⁠는 법


새벽 1시.
침대 끝에 앉아 있다.
양말도 아직 벗지 않았다.

손가락이 휴대폰 화면을 내리고 있다.

대학 동기 A의 인스타그램.
결혼 4년차, 아이 둘.
B의 링크드인. 박사 과정 수료.
C의 프로필. 외국계 회사 과장 승진.
D의 유튜브. 강남 30평 아파트 후기.

좋아요 숫자.
해외 출장 사진.
돌잔치 사진.
아파트 창밖 야경.

손가락이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어느 순간 깨닫는다.
이렇게 새벽 1시까지
타인의 인생을 들여다보고 있는 이유가 뭔지.
더 이상한 건 — 이 사람들이 나보다 잘 산다는 걸 확인하면서도
멈추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비교 심리의 첫 번째 비밀이다.
비교는 고통이지만,
동시에 중독이다.

왜 그럴까.


왜 자꾸 남과 비교하게 될까

이 모든 것의 시작은 생각보다 훨씬 어린 시절이다.

아홉 살.
집 앞 골목.
오후 4시 22분.
어머니가 시멘트 벽에 연필로 줄을 긋는다.
먼저 옆집 아이.
그 다음 나.
옆집 아이의 줄이 손가락 두 마디 위에 있다.

어머니가 말한다.

“옆집 아이가 너보다 두 살 어린데. 잘 먹어서 그런가?”

그 순간 아이는 이해한다.
두 마디의 차이가 키의 차이가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잘 먹은 정도이고,
어머니가 못한 정도이고,
내가 모자란 정도다.

그날 저녁 아이는 밥을 두 공기 더 먹는다.
배가 목까지 차오를 때까지.
어머니가 흐뭇하게 웃는다.
아이는 그 미소를 보며 계속 먹는다.

많은 사람이
자신이 비교를 ‘시작한’ 정확한 순간을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이 사건이 아니라 학습이기 때문이다.

아홉 살의 그 두 줄이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 줄은 자라면서 점점 많아진다.

성적이 되고,
직업이 되고,
연봉이 되고,
아파트 평수가 되고,
SNS 팔로워 수가 된다.

비교의 자는 하나가 아니다.
만나는 사람 수만큼 늘어난다.

그리고 평균은
언제나 자신보다 잘돼 보이는 사람들로만 계산된다.


심리학에서는 무엇이라 부를까

사회비교이론 (Social Comparison Theory)

1954년 심리학자 레온 페스팅거는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과 가치를 평가할 때
객관적 기준보다
타인과의 비교를 사용한다는 것을 밝혔다.

이것이 사회비교이론이다.

인간에게 비교는 본능이다.
자신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 파악하는 것은
사회적 동물로서 생존과 연결되어 있다.

문제는 이 본능이 현대 사회에서,
특히 SNS 환경에서 과잉 활성화된다는 것이다.

인스타그램 피드는
인간이 진화적으로 처리하도록 설계된 것보다
훨씬 많은 비교 대상을 동시에 제공한다.

상향비교 (Upward Comparison)

비교에는 두 방향이 있다.
자신보다 나은 사람과 비교하는 상향비교,
자신보다 못한 사람과 비교하는 하향비교다.

상향비교는
일시적으로 동기 부여가 되기도 하지만,
만성적으로 반복되면
자기 불만족과 우울로 이어진다.

비교가 고통스러운 이유 중 하나는
비교 평균이 항상 자신보다 높게 설정되기 때문이다.

동기 여덟 명 중 자신보다 잘된 네 명만 기억에 남는다.

비슷하거나 못한 네 명은 계산에서 빠진다.
이것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인지적 편향이다.

외부 준거점 (External Reference Point)

자신의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를
심리학에서는 준거점이라고 부른다.

내부 준거점을 가진 사람은
어제의 자신과 비교하며 성장을 측정한다.

외부 준거점을 가진 사람은
타인의 위치를 기준으로 자신을 측정한다.

아홉 살,
벽에 그어진 두 줄이 외부 준거점의 시작이었다.
눈금 0의 자리에는 늘 타인이 서 있다.
그 자리에 자기 자신을 놓은 기억이 없다.
자는 하나가 아니다.

평생 동안 남이 준 자를 손에 들고 다녔다.

비교 강박 (Comparison Compulsion)

비교가 괴롭다는 것을 알면서도 멈추지 못할 때,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강박적 비교라고 부른다.

새벽 1시에 SNS를 스크롤하면서
고통스러운데도 멈추지 못하는 것,
그것이 비교 강박의 증상이다.

이것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비교는 뇌의 보상 회로와 연결되어 있다.

자신이 상대보다 낫다는 순간적 확인이 도파민을 자극한다.
그 쾌락을 위해 고통스러운 비교를 반복하게 된다.


이런 사람이라면 당신 이야기일 수 있다

다음 중 해당되는 항목이 있다면, 이 글이 당신 이야기일 수 있다.

  • SNS를 보면 이유 없이 초라해진다
  • 타인의 성공 소식에 진심으로 기뻐하기 어렵다
  • 성공해도 더 잘된 사람이 먼저 떠오른다
  • 내가 뭘 원하는지보다 남이 무엇을 가졌는지가 먼저 눈에 띈다
  • 목표를 달성하면 기쁘기보다 다음 목표가 바로 생긴다
  • 친구 모임 후 이유 없이 기분이 가라앉는다
  • 완전히 쉬지 못한다. 쉬는 동안에도 남들은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 나보다 못한 사람과 비교해야만 잠깐 안심된다
  • 자기 결정이 타인보다 뒤처지는 것처럼 느껴질 때 불안해진다

해당 항목이 많다고 해서 당신이 얕거나 의지가 약한 것이 아니다.
당신은 아주 어릴 때부터 잘못된 자를 손에 쥐어왔을 뿐이다.


왜 이겨도 행복하지 않을까

열다섯 살에 다음 시험에서 7등을 한다.
이겼다.
처음으로 기분이 좋다.
그리고 동시에 또 다른 누군가가 떠오른다.
이번엔 내 아래에 있는 사람.

비교의 역설이 여기 있다.

비교에서 이겨도 만족은 순간이다.
이기는 순간 다음 비교 대상이 생긴다.
지는 순간엔 따라잡아야 할 이유가 생긴다.

어느 쪽이든 비교는 멈추지 않는다.

심리학자들은 이것을
쾌락의 쳇바퀴(Hedonic Treadmill)라고 부른다.

더 빠르게 달릴수록
제자리를 유지하는 데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해진다.

쉰둘,
25년 만에 만난 동기 J가 말한다.

“나 암이었어. 그동안 너무 잘못 살았다는 생각이 들더라. 너무 달렸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알게 된다.
0의 자리에 있던 그 사람도 아팠다는 것을.

비교의 앞에 있어도 뒤에 있어도,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지쳐 있었다는 것을.

자는 연봉을 잴 수 있다.
학벌도 잴 수 있다.
집 크기도 잴 수 있다.

하지만 자는 절대 재지 못한다.

누가 밤마다 울었는지.
누가 두려웠는지.
누가 자기 인생을 잃어버렸는지.


어떻게 내 자를 되찾을 수 있을까

자를 내려놓는다는 것이
경쟁을 포기하거나
노력을 멈추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눈금 0의 자리를 바꾸는 것이다.
타인의 위치가 0이었던 자에서,
어제의 나 자신이 0인 자로.

쉰여덟 살,
정원에 앉아 자 한 개를 내려놓는다.

“옆집 아이 키. 1977년.”

49년 전의 자다.
두 조각으로 부러뜨려 흙에 묻는다.
그리고 처음으로 꽃 한 송이를 옆집 꽃과 비교하지 않고 바라본다.

꽃은, 그냥 꽃이다.

이 변화는 한 번에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시작은 단순하다.

오늘 SNS를 열기 전에 잠깐 멈춰본다.

지금 내가 보려는 것이 영감인지,
비교인지.

타인의 하이라이트를 보기 전에
오늘 내가 한 것 중 한 가지 괜찮은 점을 먼저 찾아본다.

그리고 아이와 함께 있다면,
벽에 두 줄을 긋기 전에 이렇게 말해줄 수 있다.

“너는 네 속도로 크고 있어.”

당신이 평생 듣지 못했던 바로 그 한 마디를.


그 자는 당신이 다른 사람을 재는 동안에도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당신이 자기 자신을 한 번만 제대로 봐주기를.

이 주제를 한 사람의 58년 이야기로 담은 영상이 있습니다. 글로 읽은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닿을 수 있습니다.


관련 글

By:


생각 나누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